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뉴욕항에 자유의 여신상 서다

딸기21 2009. 10. 27. 19:49
728x90
“여기 해지는 바닷가에 횃불을 든 여인이 있으니 그 불꽃은 투옥된 번개, 그 이름은 추방된 이들의 어머니/횃불을 든 손은 전 세계에 환영의 빛을 보내며 부드러운 두 눈은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오랜 대지여,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고자 열망하는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리는 고향 없는 자들을 내게 보내다오”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에 새겨져 있는 에머 래저러스의 소네트다.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옮겨져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상의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제막식에 나와 양국의 우의를 기렸다. 널리 알려진대로 자유의 여신상은 그해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서 기증한 것이다. 뉴욕항 앞바다 리버티 아일랜드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게가 225t에, 지면에서 횃불까지의 높이는 93.5m에 이른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정치인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라예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설계는 유명조각가 프레데릭 바르톨디가 맡았다. 바르톨디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과 친해서 이집트를 자주 방문했는데, 이집트와 로마의 고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고대 이집트의 사라진 유적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로마제국의 리베르타스(자유의 여신) 상과 같은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집트의 지배자 이스마일 파샤에게 그런 아이디어를 냈으나 좌절됐다. 마침내 그의 꿈을 이뤄준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입상은 1884년 완성됐으며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해체될 때까지는 파리에 서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조각상이었던 이 여신상을 분해해서 배에 싣는데에도 엄청난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해체와 분해, 재조립을 맡은 사람은 에펠탑을 건축한 귀스타브 에펠이었다.

고대 의상에 횃불을 높이 든 여신상은 1886년 뉴욕항에 들어왔을 때부터 1902년까지는 항구의 등대로 쓰였다. 당시 여신상 꼭대기의 불빛은 40㎞ 밖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여신상은 미국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등대’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롱아일랜드 항공학교 졸업생인 멕시코출신 파일럿 후안 파블로 알다소로는 1913년 졸업비행 삼아 여신상의 머리 위를 비행기로 날았다. 이후 이 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여신상 상공을 비행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이후 ‘어얼리 버드 비행쇼’로 굳어졌다. 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여신상의 제단 밑에 미국이민박물관을 세웠다. 여신상은 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