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공은 둥글대두

한국의 승리, Quicksilver soccer

딸기21 2002. 6. 19.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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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 팀의 월드컵 8강 진출. 아주 재미있었다. 집에서 혼자 꼭꼭 숨어서 TV를 봤는데, 나야 뭐 이탈리아가 올라가도 좋고(잘 생긴 선수들 계속 볼 수 있어서) 우리나라가 올라가면 더 좋고 하는 심정으로 브라운관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설기현의 골, 그 순간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이유가 뭐였을까 나 스스로 궁금해했을만큼 감동했다. 별로 민족주의자 아니고, 설기현이 예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처럼 못 먹고 자라난 헝그리의 화신도 아닌데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각 동마다 베란다 문 열어놓고 대전경기장의 함성에 맞춰 똑같이 함성을 지르는 기현상. '사회정의' 차원에서라도 설기현이 꼭 한 골은 넣어줬으면 했기 때문에, 아니 누군가가 골을 넣는다면 설기현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랬기 때문에 더 기뻤다.

오늘 아침 나의 업무는 어제 경기에 대한 유럽-아시아의 반응들을 살펴보는 거였다. 신문에 '외신들이 대서특필했다'고 나오면 뻥인 경우가 많지만 이번엔 정말 외국 언론들도 놀라 나자빠진 모양이다.
점잖은 르몽드 슈피겔 다들 어제 결과에 '경악'하긴 했었나보다. 며칠 전 프랑스어도 모르는 주제에 르몽드 인터넷판을 봤었는데, 세계최고라던 프랑스팀이 1승도 못 거둔 채 돌아왔을 때 "르 블뢰가 쪽문으로 들어왔다"고 탄식했던 이 신문이 오늘은 한국-이탈리아 경기를 자기네 탈락보다 더한 `이변 중의 이변'으로 꼽았다.
 
외신의 반응들 중에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로이터의 기사였다. 로이터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성공적인 플레이를 펼쳐보인 한국 축구팀에 `퀵실버 축구(Quicksilver socc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어로 수은(水銀)을 의미하는 `퀵실버'가 주는 어감처럼, 빠르고 유연하면서 적절한 움직임으로 빛을 발하는 축구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 로이터 통신은 흩어지는 듯 하면서도 뭉치고, 흐르는 듯 다시 결집되는 한국팀의 플레이를 칭찬하면서 "전반 안정환의 페널티 실축과 비에리의 선취득점으로 한국팀이 특유의 `퀵실버 사커'의 흐름을 잃는 듯했으나 후반 이후 오히려 플레이가 살아났다"고 보도했다.
퀵실버 사커. 아주 대단한 스트라이커, 한마디로 말해 '천재'는 없지만, 없는대로 굴러갈 수 있는 유연하고 결집력 있는 구조. 퀵실버라는 말이 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스타일을 제대로 짚어낸 것 같아서 기분이 괜찮았다.

옥의 티 하나라면 역시나 어제 심판의 판정일게다. 심판이 오심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포르투갈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마음 한구석에 찌꺼기를 남겨둔 것처럼 찜찜한 게 사실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피아자 델 포풀로 광장에 모여 경기를 지켜보던 은 이날 경기에서 심판이 프란체스코 토티 선수를 퇴장시킨 뒤 안정환의 골든 골로 승패가 판가름나자 "심판에게 죽음을(직역하면 이렇게 되지만 우리 식으로 하면 '심판 죽여라')"이라고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행진을 벌였단다. 흥분한 팬들 중 일부는 삼삼오오 모여 한국팀을 응원하던 교민들에게 "도둑(놈)들""당신들이 승리를 훔쳐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는데, 이탈리아 여행갈 일 있으면 당분간 빨간 티셔츠는 꼭꼭 숨겨놓고 가야될 것 같다(갈 일은 없지만).

금요일에는 브라질-잉글 전이 드뎌 열린다. 당근, 브라질이 얄미운 잉글 넘들을 팍삭 눌러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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