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2002년 동티모르 독립

딸기21 2009. 5. 2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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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는 인도네시아 옆에 있는 열대의 작은 섬이다. 18세기에 티모르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1849년 네덜란드에 섬의 서쪽 부분을 양도했고, 네덜란드 땅이 된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속해 1948년 독립했다.
포르투갈령으로 남아있던 동티모르에서는 독립투쟁이 계속돼 75년 좌파 독립혁명전선(프레틸린)과 친 인도네시아 세력 간 내전이 벌어졌다. 프레틸린은 그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정부는 좌파 정부 수립을 막아야 한다며 12월 동티모르를 무력 침공했다.


수하르토는 이듬해 7월 아예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해버렸다. 미국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는 동남아 ‘반공 전선’에 선 인도네시아를 편들며 동티모르 합병을 묵인했다.
미국은 자기네 무기를 사는 큰손 중 하나였던 인도네시아의 군사적 팽창정책을 용인한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티모르 해저의 석유 자원도 서구의 방조를 부추긴 요인 중 하나였다.

인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의 아체, 파푸아 서부의 이리안자야에서도 분리독립운동이 벌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특히나 동티모르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인도네시아와는 이질적인 곳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이고 언어도 민족도 다른 동티모르는 이미 포르투갈 식민통치 말기부터 독립을 준비해오고 있었다.
침공 당시 동티모르 인구 68만명 중 10만명을 학살한 수하르토 정부는, 점령 뒤 주민의 80%를 집단수용소에 가두고 무지막지한 동화정책을 펼쳤다. 기아와 질병, 커피플랜테이션과 목재 반출로 섬은 피폐해졌다.
수하르토는 동티모르인들을 다른 섬으로 보내고 인도네시아인들을 집단이주시켜 인구구성을 억지로 바꾸었다. 이주해온 인도네시아인들은 동티모르의 지배계층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내부식민지의 피압박민중이 됐다.

80년대가 되자 프레틸린은 사나나 구스마오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내세워 본격 저항에 나섰다. 구스마오는 자치정부 격인 국민저항회의를 만들고 국민해방군을 조직했다. 92년 구스마오가 체포된 뒤에도 국민해방군의 투쟁은 시들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망명운동가 조제 라모스 오르타가 서방권과 국제인권기구들에 참상을 알렸다. 카를로스 벨로 주교는 교황 바오로2세의 방문을 이끌어내는 등 가톨릭 교회를 통해 동티모르의 실태를 알려나갔다.
벨로 주교와 오르타가 96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동티모르 문제는 국제적인 이슈로 부상했다. 다음 해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면서 “구스마오와 만나게 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동티모르 독립의 당위성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독재자 수하르토는 국민들의 저항과 금융위기라는 안팎의 위기를 만나 98년 쫓겨났다. 뒤를 이은 BJ 하비비 대통령은 유엔과 동티모르 독립에 합의했다. 99년8월 주민투표에서 동티모르인들은 압도적 찬성으로 독립을 택했다. 두달 뒤 인도네시아 의회는 동티모르 강제합병 무효화를 결정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관리하에 동티모르는 3년에 걸쳐 독립을 준비했다.
2002년 5월 20일 0시(현지시간), 구스마오 초대 대통령은 수도 딜리의 타시톨로 광장에서 ‘티모르-레스떼(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공식 선포했다. 포르투갈 식민지배에 들어간지 478년, 인도네시아에 강점된지 27년만이었다. 타지로 떠나갔던 사람들까지 돌아와 현재 동티모르의 인구는 113만명에 이른다. 독립투쟁만큼이나 험난한 ‘빈곤과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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