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도조 히데키 전범 기소

딸기21 2009. 4. 2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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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년 도쿄 고지마치에서 일본제국 육군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도조 히데키는 190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들어가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해 2년만에 중위로 승진, 육군대학교 졸업 뒤 대위 승진, 중대장 승진. 1919년에는 스위스에서 주재 무관으로 일하기도 했고, 20년에는 소좌로 올라갔다. 이듬해 다시 독일에 파견돼 주재관으로 근무하는 등 당시 일본 ‘제국 군대’에서는 두드러지게 ‘서구화’된 인물이었다.

행정과 야전경험 모두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도조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이 됐고, 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됐다. 일 처리가 빨라 ‘가미소리(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관동군을 이끌게 된 이후 도조의 행보는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궤적과 그대로 일치한다. 37년 중국에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 안팎에서는 중국측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여론이 일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중일전쟁의 확전을 밀어붙인다. 
이듬해 육군 차관이 된 그는 40년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승진한다. 도조는 일본이 독일·이탈리아와 이른바 ‘삼국 동맹’을 맺게끔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파병해 전쟁 준비를 추진한다. 미국이 인도차이나 철군을 요구하자 이에 맞서며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키고, 41년 스스로 총리가 된다. 
도조 내각은 도조 1인에 의해 움직여지는 전무후무한 독재적 내각이었다. 그는 총리 취임과 함께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을 겸했다.

도조 내각은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전화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진주만 공습을 지시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동남아와 태평양 곳곳으로 전선을 확대한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광의 말로는 ‘패배’였다. 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 빼앗긴 책임을 지고 도조는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이듬해 8월 일본의 항복 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

도조는 1946년 4월 29일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됐다. 48년11월12일에는 도이하라 겐지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한달여 뒤인 12월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죽기 직전까지도 참회하지 않고 “아미타불 곁으로 가는 기쁨”을 노래한 유언시를 남겼다. 
78년 도조는 다른 A급 전범들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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