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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93년 3월19일,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씨 북송

딸기21 2009. 3. 1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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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19일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이인모)씨가 북으로 송환됐다. 그의 일생에는 한민족 비극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17년 10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씨는 해방 후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52년 빨치산 토벌대에 검거돼 7년간 복역 뒤 출소했으나 61년 부산에서 좌익 지하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됐다. 리씨는 두 차례에 걸쳐 총 34년간 옥살이를 한 뒤 88년 석방됐다.

89년 리씨가 월간 ‘말’지에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는 수기를 연재하면서 ‘송환’ 이슈가 제기됐다. 91년 고위급회담 때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리씨 부인의 답장을 남측에 전달하면서 가족의 생사가 확인됐다. 민주화실천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등은 국내에 연고가 없는 리씨를 북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벌였고, 북측도 대남방송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다. 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리씨를 북으로 보냈다. 99년 말 김대중 정부가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로 불리던 신광수·손성모씨를 석방하자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운동에 힘입어 이북에 가족을 둔 장기수들이 추가로 북송됐다.

북한 당국은 리씨가 평양으로 송환되자 ‘영웅’으로 부각시키면서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고(故) 김일성 주석은 리씨를 직접 병문안했으며, 리씨를 소재로 삼은 엽서와 우표가 발행됐다. 리씨에게는 김일성 훈장과 영웅 칭호가 내려졌다. 그를 다룬 영화와 찬가까지 만들어졌다.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리인모인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평양에서 부인과 함께 살다가 2007년 6월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주관 아래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해 7월에는 평양시내에 리씨의 동상이 건립됐다.

송환에서 사망까지 그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국군포로와의 교환 없이 북으로 보내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북송 뒤에는 “예상대로 대남 선전수단으로만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반면 지난해 한 탈북자는 “리씨도 북한 인권실태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평양으로 간 리씨가 남북한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확인할 길도 없다. 하지만 16년 전 ‘인도적 송환’이 이뤄졌던 때보다도 더 후퇴한 듯한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았더라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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