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미얀마 사태 10문 10답

딸기21 2007. 9. 2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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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도 민주화의 봄은 올 것인가.
수십년의 군사독재정권에 시달려온 미얀마(버마) 국민들이 1988년에 이어 다시 민주화 항쟁을 시작했다. 아시아의 빈국 미얀마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와 유혈진압 사태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미얀마의 실상과 이번 사태의 원인을 알아본다.

1.대대적인 민주화 시위를 촉발시킨 미얀마의 정치상황은

극도로 억압적인 군사독재정권이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북한과 유사한 주민 감시ㆍ억압체제가 형성돼 있다. 10집 중 1집은 이웃 동향을 군정에 보고해야하는 감시제도가 있고, 밤이든 새벽이든 보안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수색한다. 거주이전은 물론 자국 내에서조차 여행의 자유가 없다. 민간 언론은 거의 봉쇄돼 방송과 통신을 정부가 모두 통제하고 있다. 이메일도 정부가 지정한 서버로만 주고받아야 할 정도다. 이번 시위 발생 뒤에는 이동전화 연결도 막혔고, 전화는 늘 도청된다고 현지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2.경제사정은 어떤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연간 170달러(구매력 기준 1800달러)로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빈국이다. 인구 4700만명 중 4분의1은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한 성장 가능성이 있었으나 부패한 군정이 계속되면서 퇴보했다. 1980년대까지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진한 것도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 됐다. 1990년대 들어 미얀마로 국가 이름을 바꾼 뒤 군정이 일부 자유화 개혁조치를 취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반(半) 사회주의식 폐쇄경제가 유지되고 있다. 2003년8월 미국이 아웅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을 해제할 것을 촉구하며 경제제재 강도를 높이자 금융위기가 발생해 은행 20여곳이 도산했다. 그런데도 고위 관리들은 호화 사치 생활을 해 국민들 분노를 사고 있다.

3.이번 대규모 시위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값 파동이었다는데

지난 8월17일 시작된 이번 시위의 원인은 정부의 갑작스런 기름값 인상 조치였다. 예고도 없이 군정이 휘발유값 등을 5배나 올려버리면서 시위가 벌어졌다. 가뜩이나 생활수준 떨어진 상태여서 공무원이나 교사 급여가 30달러 안팎에 불과한데 유가 폭등이 겹치면서 `생계형 봉기'가 촉발된 것이다. 소득은 적은데 현지 공산품 가격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공식 환율은 달러당 6.5짝(미얀마 화폐단위)이지만 암시장에선 1달러가 1200짝에 팔린다. 시골의 불교 사원들에는 점심 때가 되면 끼니를 얻으러 오는 빈민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4.시위대의 궁극적인 요구는 군정 퇴진인가

당초 경제적 요구에서 시작됐던 시위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쪽으로 바뀌어 군정을 압박하고 있다. 미얀마는 1948년 독립했지만 해방 뒤 혼돈기를 거치고 1962년 느윈 군사정권이 들어서 1988년까지 장기간 독재를 했다. 1988.8.8 이른바 `88혁명'으로 잠시 민주화의 봄이 오는 듯했으나 두달 만에 서마웅이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1990년5월 역사적인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이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압승을 거뒀지만 서마웅은 정권을 넘겨주는 대신 탄압을 자행했다. 1992년에는 군정 내에서 재차 쿠데타가 일어나 서마웅 정권이 무너지고 현 군정지도자 탄슈웨가 정권을 장악, 15년째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는 군정이 물러나지 않으면 미얀마의 변화와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5.불교의 영향력과 승려들의 위상은

영국 식민통치와 뒤이은 1930년대 인도의 점령통치 기간 불교 승려들이 해방투쟁에 적극 참여했고, 1980∼9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도 주축 역할을 하는 등 불교와 저항운동의 관계는 뿌리가 깊다. 군정에 체포돼 있는 정치범들 중 일반인보다 승려가 더 많다고 할 정도다. 민족적으로 미얀마는 버마족(68%), 샨족(9%), 카렌족(7%), 락친족(4%) 등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90% 가까이가 불교신자여서 종교적으로는 동질감이 강한 편이다. 승려들은 `부처의 아들'이라 불리며, 특히 종단 대표 격인 `세이야 러지(큰스님)'들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그동안엔 군정도 승려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자제해온 편이다. 그러나 최근 군정과 불교계 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군정이 절까지 수색하는 상황이 됐고, 시위에 나선 승려들을 폭행하는 일이 생기면서 불교계는 물론 국민들을 격분케 했다.

6.종교계 외에 반정부 민주화세력은 어떤 이들인가

수치 여사는 십수년째 가택연금돼 있지만 여전히 민주화의 상징이자 구심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수치 역사가 이끌었던 NLD와 학생운동권 주요 인사들은 탄압을 피해 대부분 해외로 망명했고, 현재의 시위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 성격이 강하다. 해외 망명자들이 인접한 태국을 비롯해 일본, 미국, 노르웨이 등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 미얀마 내 활동을 지원하고 있지만 저항 조직은 워낙 약화된 상태다. 양곤 등지의 NLD 사무실들도 대부분 폐쇄되고 지하로 숨어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승려들이 전면에 나선 것이기도 하다.

7.미얀마 사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힘겨루기는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입증된 매장량은 적지만 미얀마는 석유와 천연가스 보유하고 있고 해양 및 대륙과 연결돼 있다. 중국과 인도 사이의 전략적 완충지대이기도 하다. 현 탄슈웨 군정은 중국, 러시아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수치 여사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1997년부터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유럽연합(EU)도 1996년부터 무기 금수조치 등 제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협력하지 않아 경제제재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시위 유혈진압을 놓고서도 서방과 중국ㆍ러시아는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8.중국과 미얀마의 관계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미얀마는 사회주의 성향의 독재정권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시작된 뒤로 군정은 거의 중국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다. 버마는 곧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버마의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이자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는 화교들에 장악됐다. 중국은 안다만해(海)에 면한 미얀마 서부 해안에서부터 중국 내륙으로 이어지는 송유관을 만들려 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서도 미얀마 군정과의 관계를 버리지 않고 있다.

9.군정이 몰락할 가능성도 있나

미얀마 저항운동가들은 `미완의 88혁명'을 완수해 군정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은 전면적인 군정 퇴진요구보다는 민주화 조치들을 요구하는 수준이지만 유혈사태가 계속되면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알 수 없다. 군정의 버팀목인 중국조차 군부와 민주화진영 양쪽에 선을 대고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실제 1990년5월 총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의 NLD가 승리하자 가장 먼저 축하인사를 보낸 것이 중국 대사관이었다. 국제사회의 압박 속에 군정이 위기에 몰리면 중국도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군정이 형식적인 유화조치들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은 상황을 점치기 힘들다.

10.미얀마와 한국의 관계는

1970년대 중반까지 미얀마는 한국보다 북한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쪽으로 기울어졌고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 이후에는 북한과 단교했다. 한국 역시 국제사회의 비판적인 시선 속에서도 미얀마 군정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해에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미얀마 군정과 천연가스 개발계약을 맺으면서 무기 생산설비를 수출,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말 현재 한국 기업의 미얀마 투자액은 약 2억달러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대우인터내셔널과 효성 등 50여개 기업들이 진출해있고 한국계 봉제공장 4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교민은 800여명인데 대부분 양곤에 거주하고 있다. 양국간 비자 관련 협장이 없어 미얀마 방문 시에는 반드시 사전에 비자를 얻어야 하며, 최장 1년까지 체류가 가능하다. 이번 시위사태 발생 뒤 정부는 미얀마의 여행경보단계를 `여행유의국가'에서 `여행자제국가'로 상향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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