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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고민 & 터키 현대사 연표

딸기21 2007. 4. 3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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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터키를 참 좋아했던 한 관광객의 입장에선, 한국전 참전 & 형제의 나라... 이런 거 들먹이지 않더라도, 참 이 나라의 행복을 빌고 싶은데 말이죠.

`동서양의 교차로'로 불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120만명이 참석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근본주의 움직임이 강화되는 것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붉은 초승달이 새겨진 국기를 들고 나와 거리를 덮었습니다.

이스탄불을 붉게 물들인 `시민들의 항거'는 유럽과 이슬람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터키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서구식 입헌민주주의제도를 지켜나갈 것이냐, 이슬람주의로 향할 것이냐... 이 논쟁은 또한 21세기 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의 한 단면을 드러내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세속주의를 지켰던 이라크는 그넘의 미국 덕에 이슬람주의로 가고 있고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이고 있지요)

이스탄불의 시위대 / 로이터



발단은 '대통령'

터키 최대 방송사인 CNN투르크는 29일 이스탄불 일대에 120만명이 운집, 대통령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최소 75만명(경찰 추산)이 거리로 나서 이스탄불을 붉은 깃발로 덮었다고 전했습니다.

군중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든 것은 지난 27일 의회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터키 대통령은 550명 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됩니다. 내각책임제 국가여서 대통령에게 실권은 없지만 이번 대선은 이슬람주의 성격이 강한 여당 정의개발당(AK)을 심판한다는 의미에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초 AK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도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를 후보로 내세우려다가 여론 반발에 부딪쳐 압둘라 귤 외무장관으로 바꿨더랬지요. 선거 이틀전에 후보로 지명된 귤 장관은 의회 투표에 단독 출마했으나 당선에 필요한 제적의원 3분의2(367명)의 찬성표에서 10표 모자라는 357표를 얻어내는데 그쳤습니다.

현행법상 의회는 2차, 3차 투표를 계속해서 실시할 수 있습니다. 3차례 이상 투표가 실시될 경우 제적의원 과반수의 지지만 얻어도 당선이 확정된다고 합니다. AK는 현재 의석 절반이 넘는 353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굴 후보의 대선 승리는 `시간'에 달린 문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귤 장관이 에르도안 총리만큼은 아닐지언정 역시 이슬람주의를 신봉한다며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터키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거지요. 야당은 국민 여론에 힘입어 헌법재판소에 투표무효심판을 냈습니다. 투표 절차를 규정한 헌법 조항이 불분명하게 돼있다는 건데요. 야당은 `제적의원 3분의 2 이상 투표 참여' 규정을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

헌법재판소는 이르면 1일 1차 투표가 유효했는지 여부를 판단해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당은 야당의 주장이 이미 형성돼 있는 룰에 대해 트집을 잡는 것일 뿐이라며 일축하고 있습니다.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이슬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터키 최대 경제단체인 투시아드(TUSIAD)도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습니다(투시아드는 터키의 시장자본주의, 개방경제를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4년째 외무장관을 지내고 있는 귤 후보는 국제무대에 잘 알려진 인물이고, 온건보수파로 평가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가 속한 AK의 이슬람 색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이슬람식 머리쓰개를 쓰고다니는 귤 부인의 옷차림을 거론하며 "히자브(머리쓰개)를 쓴 퍼스트 레이디는 필요없다"는 구호를 내걸었다고 합니다. 귤 후보가 선거 전 "세속주의 원칙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공약했지만 국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1923년 근대 터키공화국을 건국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아타튀르크는 '투르크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나중에 무스타파 케말에게 추서됐고요- 파샤 즉 통치자였다는 의미에서 '케말 파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는 서구식 입헌민주주의제도를 국가의 근간으로 선언했습니다. 이 세속주의 원칙은 터키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지방에선 이슬람법(샤리아)에 바탕을 둔 부족세력들이 헌법에 반하는 통치를 시도하곤 했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 이슬람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자유시장경제와 입헌민주주의를 지지하며 이슬람법에 반대하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 반미, 반서방 정서가 고조된 것이 사실입니다. 유럽연합(EU) 가입 노력이 좌절되면서 반유럽 감정도 커졌습니다.

군부가 또 나설까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AK 정부는 일각의 보수화, 이슬람화 움직임에 편승해 쿠르드족 분리 움직임을 탄압하고 비판적인 언론들을 봉쇄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을 비롯한 작가들을 `국가 모독' 혐의로 기소하고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들을 물밑에서 지원했다고 합니다. 지난 2월 일어난 극우파들의 비판적 언론인 흐란트 딩크 암살사건 등은 터키 정부가 이슬람 세력의 준동을 묵인한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었던 겁니다.

현재 최대 관심사는 군부의 움직임입니다. AK정부의 이슬람 성향에는 군부도 누차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군은 선거 다음날인 28일 "선거결과를 우려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아타튀르크의 `청년투르크당'에서 출발한 터키 군부는 공화국 역사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거나 `민간 독재' 조짐이 일 때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몰아낸 뒤 세속주의를 되살리고 다시 후방으로 물러나는 독특한 `전통'이 형성된 건데요. 군은 1960년, 1971년, 1980년 정부를 무너뜨린 적이 있습니다. 1997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정당이 집권하게 되자 역시 군부가 나서서 정부를 무너뜨린뒤 다시 민정에 이양하기도 했습니다.

민주적이라고 보기 힘든 이런 행태가 터키에서는 역설적이지만 세속주의를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헌법재판소가 집권 AK에 유리한 판결을 내놓고 이에 대한 반발로 사회 혼란이 극심해질 경우 군부가 다시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합니다.

몇달 전 터키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는 걸 보면서 '좋은 나라가 하나 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이집트, 사우디, 이라크, 급기야 이란과 터키까지... 몽땅 미국의 탓도 아니고, 몽땅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탓도 아니고... 뒤죽박죽 되어버린 저들 나라에서 결국 가장 큰 피해를 겪을 사람들은 소수민족과 여자들이겠지요. 터키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면 좋겠습니다.


현대 터키 정치사 연표

1974년 터키 군 북키프러스 침공, 미국의 경제제재 시작
1923년 터키공화국 건국, 아타튀르크 대통령 취임
1925년 서양식 달력 채택, 페즈(투르크식 모자) 착용 금지
1928년 종교적 요소를 없앤 세속주의 헌법 선포
1930년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다시 개명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이스메트 이노누 대통령 취임
1945년 2차 대전 `중립' 선언
1950년 최초의 민주적 총선거, 야당인 민주당 승리
1952년 `중립' 입장 포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1960년 군사 쿠데타, 민주당 정권 붕괴
1961년 새 헌법 통과, 상하 양원제 도입
1963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준회원국으로 가입
1965년 술레이만 데미렐 총리 취임
1971년 군부, 정치폭력 사건 일으킨 데미렐 총리 정부 전복
1976년 5000여명이 숨진 반 지역 대지진 발생
1980년 정당 간 싸움 뒤 군부 쿠데타, 군법 체제 발효
1982년 단원제로 바꾼 새 헌법 발효
1983년 총선으로 투르구트 오잘이 이끄는 모국당 정부 집권
1984년 쿠르드노동자당 분리독립전쟁 시작
1992년 터키군, 쿠르드 지역 점령 시작
1993년 최초의 여성총리 탄수 칠레르 집권. 데미렐 대통령 취임
1995년 터키군,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 침공
1996년 최초의 이슬람 정부인 복지당의 네즈메틴 에르바칸 총리 정부 탄생
1997년 군부 압력으로 에르바칸 정부 붕괴
1998년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 강제해산
1999년 1만7000명 숨진 이즈미트 대지진 발생
2000년 아흐메트 네즈데트 세제르 대통령 취임
2001년 헌법재판소, 세속주의에 도전한 이슬람계 미덕당 해산 명령
2002년 호주제 폐지, 남녀동등권 법령 발효. 이슬람계 정의개발당(AK) 총선 승리
2003년 이스탄불 유대교회당 등지에서 연쇄 폭탄테러
2004년 유화조치로 첫 쿠르드어 TV프로그램 방영, 쿠르드 지도자들 석방
2005년 의회, 코란 교육 허용하는 정부측 친이슬람법안 승인 거부
2006년 이스탄불 등지에서 쿠르드족 무장세력 폭탄테러 발생
2007년 이슬람 극단주의자, 비판적 언론인 흐란트 딩크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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